현대 사회에서 손주 육아는 조부모 세대, 특히 70대 후반에서 80대 이상의 고령층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 봐주는 건 당연하다'는 인식은 여전히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며, 자녀 세대 역시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상황에서 조부모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점을 호소한다. 그러나 조부모, 특히 80대 어르신들의 속마음은 다르다. 손주가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육아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글은 손주 육아에 지친 80대 어르신들의 진솔한 목소리와, 그 이면에 숨겨진 감정과 현실을 돌아보며, 조부모 세대도 존중받아야 할 삶의 주체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손주 육아: 사랑이지만, 너무 무겁다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일은 가족 간의 사랑과 헌신으로 시작된다. 특히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조부모 육아는 거의 필수 요소로 여겨진다. 처음에는 자발적인 도움이었고, 기쁘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아침 일찍 아이를 데리고 와서 밤늦게 데려가는 루틴이 반복되고, 하루 종일 어린 손주를 따라다니며 돌보는 일은 80대의 체력과 건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육아와 병행되는 가사노동, 식사 준비, 청소, 아이 간식 챙기기 등은 단순히 아이만 보는 것 이상의 부담을 만든다. 육체적인 고통도 심각하다. 무릎 통증, 허리디스크, 고혈압, 당뇨를 가진 고령자가 손주를 안고 업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유모차를 끌고 외출하는 현실은 단순한 사랑의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할머니가 안 해주면 누가 해줄 수 있겠느냐’는 자녀의 말은, 때로 감정적 압박으로 작용한다. 결국 조부모는 입을 다문 채 매일의 육아 전선으로 나간다. 사랑이지만, 그것은 너무 무거운 책임이 되어버린다.
80대: 인생의 마지막 구간,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80세는 인간의 생애 주기에서 분명히 '휴식과 정리의 시기'에 해당한다. 신체 능력은 급격히 저하되고, 질병 관리와 심리적 안정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 나이다. 이 시기에는 오히려 스스로를 돌보는 데 집중해야 하지만, 많은 80대 어르신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 손주 육아를 맡으면서 본인의 병원 일정은 뒤로 밀리고, 동창 모임은 참석하지 못하며, 하루의 일과가 모두 손주 중심으로 재편된다. 중요한 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손주의 보육교사인가, 밥해주는 가사도우미인가, 아니면 그냥 집에 있는 사람인가? 삶의 의미와 자존감은 본인의 선택과 일상에서 비롯되는데, 타인의 필요에 의해 하루가 구성되면 자존감은 점점 무너진다. 80세에도 꿈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배워보고 싶은 것도 있다. 그러나 손주 육아는 그 모든 것을 잠시 미루는 것이 아닌, 아예 멈추게 만들기도 한다. 조부모도 사람이고, 나이 들수록 더 많은 이해와 배려가 필요한 존재다. 80세는 ‘자녀의 부모’가 아닌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속마음: “말하지 못하는 진심, 이제는 말하고 싶습니다”
손주를 돌보는 80대 어르신들은 대부분 자녀에게 자신의 진심을 말하지 못한다. 자녀가 힘든 것을 알기에, 갈등이 생길까 두려워서, 혹은 스스로도 오랫동안 참고 사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있다. '아이가 잘되길 바라서 돕는 건데, 왜 내가 이렇게 지치고 괴로울까', '나도 힘들다고 말하고 싶은데, 자식이 상처받을까봐 입을 닫는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게 감사하면서도 부담스럽다'. 이 복합적인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억눌려 깊은 우울로 이어진다. 실제로 노인상담센터에 따르면 손주 육아를 하는 노인들의 우울증 비율은 일반 노인보다 2배 이상 높고, 자살 사고 역시 더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감정의 배출구가 없고,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사람은 가장 외로워진다. 손주는 사랑하지만, 내 삶도 사랑하고 싶다는 이 솔직한 속마음이 외면당해서는 안 된다. 조부모가 ‘그만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가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되찾는 일이다. 건강하고 존중받는 관계는 ‘솔직한 말하기’에서 시작된다.
“사랑하지만 이제는 나를 위한 삶도 필요합니다”
손주 육아는 가족의 사랑을 나누는 일이지만, 그것이 희생으로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80대는 여전히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시기이며, 남은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쓸 권리가 있다. 조부모가 손주를 보는 일이 도와주는 것이 아닌 당연한 의무가 되면, 그 안의 사랑은 어느 순간 무너진다.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도와줄 수 있지만, 내 인생을 포기할 순 없다”고. 그리고 자녀 세대도 부모의 침묵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부모의 상태를 살피고, 역할을 조정하며, 육아에 대한 책임을 나누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손주를 키우는 사랑은 일시적일 수 있어도, 조부모의 건강과 마음은 회복하기 어렵다. 진정한 가족이란 서로를 책임지기보다,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80세의 외침은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자신을 찾고자 하는 용기 있는 선언이다. 이제는 그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